그 곳에 내가 있었다. (하) – 소년영웅 창간기념 공모전 대상작

– 이어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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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를 못하는 것이 왕따가 되는 이유일까? 25명 우리 반애들을 차례대로 세운다면 누군가는 1등이고 누구는 25등이어야 하는 건데……

– 국어, 수학이 꼴등이면 왕따고, 미술, 체육이 꼴등이면 괜찮은 건가?

– 뚱뚱한 게 죄야? 그럼 키 작은 나는?

– 말이 없는 조용한 성격이 어때서?

– 못생겼다고? 기준이 뭔데? 우리 엄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대. 수영이 엄마도 세상에서 수영이가 제일 예쁠 걸.

 

생각해보니 우리의 행동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가 수영이를 놓고 ‘앞담화’, ‘뒤 담화’ 했던 건 우리의 편견과 잘난 척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거다 .

뮤지컬 배우가 꿈인 진주는 수학시간에는 조용하지만 다른 때는 혼자 이상한 노래 부르고 말도 안 되는 대사를 읊조리며 잘도 논다. ‘4차원’이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우리의 시선과 상관없이 꿋꿋하다. 아, 수영이도 진주 같았으면 좋았을 걸.

선생님이 우리가 쓴 종이를 거둬들고 말씀하셨다.

 

“수영이가 나보다 못할 것도 없고, 내가 수영이보다 나을 것도 없고, 수영이는 수영이고, 나는 나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죄인인양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너희들 미술 시간에 쓰는 물감이 몇 색이지?”

 

뜬금없는 선생님의 질문에 우리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말했다.

 

“12색이요, 18색이요. 24색이요……”

“아무리 많은 물감이어도 같은 색은 없지? 물론 내가 좋아하는 색은 더 많이 쓰지만 필요 없는 색은 없어. 25명의 각기 다른 우리가 모여 아름다운 반이 만들어 지는 걸 우리가 몰랐던 거야.”

 

서로가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거였는데……

잠시 후 선생님은 우리들이 쓴 종이를 하나하나 큰 소리로 읽으셨다. 거기에는 수영이의 좋은 점들이 무지개처럼 색색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제로콩이 못생긴 메주가 아닌 두부가 되고, 콩나물이 되고, 콩자반이 되고 우리 반에 고소한 콩떡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가만히 수영이를 쳐다보았다. 수영이는 얼굴만 빨개졌을 뿐 여전히 아무 일도 아닌 양 앉아있다. 수영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고 말씀하셨는데 수영이는 사랑으로 갚아주기를 원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거다.

수영이는 내가 천 걸음 가자고 할 때 진정 이천 걸음도 기쁘게 가줄 그런 친구인 것이다. 그런 수영이가 왕따를 당하고 언어폭력과 사이버 폭력을 당하는 그 자리에 내가 늘 있었으면서도 ‘나는 아니라고’ 했으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 이럴 때 ‘날으는 땅콩’이 할 일이 뭘까? 수영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전학을 가도 상처받은 마음이 쉽게 아물기 어렵고, 거기가도 또 지금처럼 왕따를 당할 게 뻔하다. 모르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또 저렇게 앉아 있을 텐데 .

수영이가 교실을 나가기 전에 뭔가 스트라이크를 한 방 날려야 한다. 수영이의 좋은 점을 적은 저 종이를 공으로 어디 한번 방망이를 휘둘러보자. 안 맞으면 헛스윙이라 힘은 빠지겠지만 나쁠 건 없는 거다.

나는 용기 있게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지금 우리들이 쓴 25장의 종이요. 거긴 수영이의 좋은 점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 니들이 지금 썼잖아.”

 

선생님이 안경테는 올리지 않았지만 양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 거 썼으니까 수영이 전학 안 가면 안 돼요? 아까 선생님이 말한 거처럼 우리 모두 공범자니까 앞으로 잘 지내면 죄값을 치루는 게 되잖아요.”

“뭐?”

 

선생님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네, 선생님, 수영이만 괜찮다면 … 그러면 좋겠어요.”

 

반 아이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호응하였다. 선생님이 수영이를 쳐다보았다.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수영아, 네가 선택하는 거야. 엄마가 학교 다니는 거 아니잖아. 네가 전학을 가면 더 좋을지, 아님 우리 반이 더 좋을지, 네가 선택하는 거야.”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 이건 수영이 일이다. 문제가 생기면 엄마 아빠나 선생님께 털어놓고 답을 구하는 거지 무조건 엄마의 말대로 하는 건 아니다.

 

“수영아, 결정해!”

“야, 제로콩, 그냥 있어라!”

 

여전히 별명을 부르지만 진심으로 아이들은 수영이가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같았다. 수영이가 배시시 웃었다. 들판의 이름 모를 작은 노란 꽃의 미소다.

‘홈런’은 아니지만 우리 반 주자들이 모두 ‘홈인’한 느낌이다.

 

나는 수영이를 쳐다보았다. 남에게 곧바로 양보해버리고 겁이 많은 것처럼 보였던 수영이는 사려 깊은 아이였다. 수영이의 커다란 덩치가 오늘 따라 참 넉넉해 보이며 온유해 보였다.

선생님이 교무실로 가시자 내가 앞으로 나갔다.

 

“야, 권예은, 역시 날땅이야.”

 

남자애들이 나를 보며 추켜세웠다.

 

“얘들아, 우리 모두 별명을 부르지 말거나, 아님 다같이 단체 카톡에 별명으로 하는 건 어때?”

 

찬성과 반대를 알아보고 결정하면 수영이도 불편하지 않을 거 같았다.

 

“별명이 나쁜 건 아니야, 그 사람을 말하는 거니까.”

“아냐, 나쁜 것도 있어. ‘볶음멸치’라는 별명은 나를 키 작다고 놀리는 거잖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칼슘 많은 멸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건데.”

“날으는 땅콩도 별로야, 근데 땅콩 고소하잖아.”

 

결국 우리는 별명을 불러도 별 관심 없는 애들은 그냥 부르고, 싫어하는 애들은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난 그냥 제로콩 할래.”

 

수영이의 말에 애들이 깜짝 놀랐다.

 

“이름 부르면 더 어색할 거 같애. 난 그냥 제로콩 안수영이야.”

 

제로콩으로 그렇게 놀림을 받았는데. 정이 들었나보다. 그래, 수영아, 그렇게 네 의견을 말하는 거야. 별명을 애칭이라고 하면 되게 그럴듯하거든.

아침에 일어난 소동이 학교가 끝날 때는 아주 평화로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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