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연보 (1879년 출생에서 1910년 순국까지)

안중근의사 연보

1879년 9월 2일 (1세) 순흥 안씨 안태훈 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등에 검은 점
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응칠’이라 지음.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지금의 시장 또는 군수)을 지냈으며 해주에서
미곡상을 운영함.
1884년 (6세) 갑신정변 후 부친을 따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여 서당에
서 9년간 한학, 사서삼경 및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공부.
1886년 (8세) 동생 정근 출생.
1889년 (11세) 동생 공근 출생.
1891년 (13세) 여동생 성녀 출생.
1892년 (14세) 조부 안인수 별세. 할아버지 별세의 슬픔으로 6개월간 병을 앓음.
1894년 (16세)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
황해도 재령군 양반 김흥섭의 딸 김아려 규수와 결혼.
1897년 (19세)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
아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고, 홍 신부와 함께 황해도 지방을
순회 전도.
1902년 (24세) 장녀 현생 출생.
1905년 12월 (27세) 부친 안태훈과 상의 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청국 상하이(上海)를
돌아봄. 부친의 별세로 귀국. 장남 분도 출생
1906년 3월 (28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을 정리하여 삼흥학교를 세우
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구국영재를 양성.
1907년 가을 (29세) 서북학회에 가입, 기성회의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어 국채보상운동
에 적극 참가함.
석탄 광산사업을 위해 삼합회(한재호, 송병운과 동합) 설립.
2남 준생 출생.
망명을 결심하고 부산-원산-청진-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계동청년회에 가입.
연해주에서 이범윤, 김두성, 엄인섭, 김기룡 등과 의군을 결성하고, 참
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이 되어 항일 투쟁을 전개함.
1908년 (30세) 해조신문에 「인심결합론」 발표.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
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의 평의원으로 참가.
의병부대(총독 김두성, 대장 이범윤) 중 최재형 부대 우영장으로 참가.
이강이 설립한 블라디보스토크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
국내 진공작전을 하였으나 실패.
1909년 3월 (31세) 러시아 엔치아(煉秋) 부근 카리 마을에서 김기룡 등 11명의 동지와 단
지(斷指) 동맹을 맺고, 혈서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조
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하늘과 땅에 맹세함.(3월 2일)
10월 18일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을 출발하여 요동반도 대련항에 도착.
10월 19일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목적으로 엔치야(연추)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에 도착.
10월 20일 대동공보사에서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함. 거사 자금 100원을 이
석산(이진룡)으로부터 강제 차용함. 우덕순 동지와 이토 처단을 계획.
10월 21일 8시 30분발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남. 도중에 포브파니치
나야에서 한의사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를 러시아어 통역으로 대동하고
10시 34분에 하얼빈으로 출발.
10월 22일 오전 9시 15분경 안중근 일행이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유동하의 사돈 김
성백의 집에서 숙박함. 이토는 뤼순을 거쳐 봉천(심양)에 도착.
10월 23일 안중근, 김성백집에서 이토의 만주 방문기사가 게재된 「원동보」를 읽
음. 오전에 이발을 하고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중국인 사진관에서 사
진을 찍음. 김성옥 집에 유숙하던 조도선을 만나 의거에 합류시킴
10월 24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우편열차를 타고 남행, 채가구(지야이지스
고)역에 도착. 유동하에게 채가구 도착을 알리고 일이 있으면 전보를
치라고 타전함. 유동하로부터 ‘다음날 아침 이토가 도착’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받음.
10월 25일 안중근이 채가구를 떠나 하얼빈으로 돌아옴. 우덕순, 조도선은 채가구
에서 거사하기로 하고 남음.
10월 26일 안중근, 7시경 하얼빈역 도착.
이토 일행이 9시 15분에 열차에서 하차.
9시 30분 러시아의장대 사열을 하고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는 이토를
향해 권총 3발 발사하여 모두 명중시킴.
러시아 군인이 덮치자 권총을 던지고 “꼬레아 우라” 만세를 세 번 외침.
이토 히로부미 10시에 절명.
안중근, 하얼빈역 구내에서 러시아 관헌들로부터 조사 받음.
러시아 당국은 11시 35분에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함.
11시 55분 채가구에 있던 우덕순, 조도선 체포 당함.
10월 30일 일본 미로부치 검사 안중근 1회 심문.
11월 1일 안중근외 9명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출발.
11월 3일 안중근외 9명 뤼순 감옥에 수감됨.
1910년 2월 14일 (32세) 중국 뤼순(旅順) 일제의 법정에서 6회의 공판 끝에 사형이 언도됨. 안
의사의 모친은 정근, 공근 두 동생을 급히 뤼순으로 보내 안중근을 면
회하도록 하고 엄한 권고의 말씀을 전함.
3월 8일 진남포로부터 찾아온 홍석구(빌렘) 신부가 면회옴.
3월 9~25일 홍 신부가 안 의사를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예수님의 성체성
혈을 받아 모시는 대예식을 열어 감옥소의 일반관리들이 모두 와서 참
례함. 뤼순감옥에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전옥, 소노키 통역, 나
카무라 간수장, 미즈노·가마다 두 변호사 등의 입회 하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 신부를 면회하고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3월 15일 탈고한 후 사형집행 전까지 「동양평화
론」 을 씀.
3월 26일 안 의사 의거 후 152일이 되는 3월 26일 상오 10시에 사형이 집행됨. 모
친이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은 안 의사는 뤼순감옥 형장에서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
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심. 유해는 보통 사
형수와 달리 새 송판으로 침관을 만들어 입관하고 뤼순감옥 죄수 묘지
에 안장하였음.
안정근과 안공근이 안중근의사 유해를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감
옥 당국으로부터 거절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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