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충정의 요람 현충사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곳은 어디에 어떻게 만들어져 있을까요?
이 글을 통해 먼저 알아보고 가족들과 꼭 한번 방문해보도록 합시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지 백여 년이 지난 후인 1706년(숙종 32)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두 해 전인 1704에년 충청도 유생들이 “호령하고 싸우던 남해안 곳곳에는 많은 서당이 서고 사액까지 되었는데 공이 옛날 사시던 마을이며 거리가 온전한” 아산 땅에 사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조정에 사당 세우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당이 설립된 이듬해인 1707년 숙종은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충사는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습니다. 이때 없어진 현충사 자리, 즉 지금의 충무교육원 뒷산 기슭에는 1906년에 세워진 ‘현충사유허비’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전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지역의 유림들이 이순신을 선양함으로써 일제의 주권 침탈에 저항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한 것입니다.

그러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다시 존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이순신이 새롭게 부활하였습니다.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의 전기를 연재하여 일본의 침략으로 다시 고통에 빠진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줄 인물로 이순신 장군을 부활시켰습니다. 이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많은 민족 열사들이 이순신에 대한 전기를 펴내면서 점차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현충사는 다시금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이순신은 해방과 혼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부흥시키는 데에도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1949년 이은상의 주도로 조직된 이충무공기념사업회는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민족의 정신적 도표(導標)를 우리 국사상의 정신적 지보인 충무공 이순신’으로부터 찾고자 하였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충무공의 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움직임으로 1951년에 『민족의 태양』이 발간되고, 새로이 영정 제작이 추진되어 1953년 10월 장우성이 그린 새 영정의 봉안식이 거행되기도 하였습니다 .

196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현충사 성역화사업(신성한 지역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행되어, 구역을 확장하고, 사당을 웅장하게 신축하는 한편 조림(造林, 기존의 숲을 손질하거나 다시 살리는 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동시에 탄신기념행사를 국가행사로 법으로 정하고, 충무공의 위업과 현충사 행사를 교과과정에 반영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현충사 일대는 사적(155호-아산이충무공유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충사는 광대한 경역에 잘 가꿔진 조경으로 이름 높아, 위락시설이 부족하던 당시에는 온양온천과 예산 수덕사를 포함한 2박 3일 신혼여행지로도 손꼽히며 연간 참배객이 100만 명을 넘기도 하였습니다.

현충사에는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충무문(외삼문), 정려, 구본전, 충무공고택과 활터, 이면공묘소, 홍살문, 충의문(내삼문), 현충사(사당) 등이 있습니다. 현충사(사당) 내부에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내벽에는 이순신의 일생에 서 주요한 열 장면을 담은 십경도가 걸려 있습니다.

고택 옆에는 500살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순신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이곳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 능선은 충무공이 무예를 닦으며 말을 탔던 곳이라 하여 치마장(馳馬場)이라 불립니다.

 

 

 

자료 제공 : 문화재철 현충사 관리소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00-1
전화 : 041-539-4600
홈페이지 : http://hcs.cha.go.kr/

출처 : 소년영웅 2월호 (2018년 12월) (구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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